'캔디'의 머리를 밀어버린, 80년대 파름문고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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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주 작성일23-06-10 03:30 조회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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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의 책장에는 소녀들 사이에서 붐을 일으켰던 '괴작', 동광출판사의 일명 파름문고 시리즈가 꽂혀 있었다. '주니어 소설'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달고 포켓북처럼 책 사이즈는 작으면서 가로가 짧고 세로가 길었다. 당시로서는 감각적이었던 판형, 모딜리아니를 연상케 하는 목이 길고 추상적이면서 로맨틱한 초상이 실린 표지가 80년대의 소녀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이 파름문고 시리즈가 괴작이었던 이유는 당시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저작권 문제를 희한하게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과 문화 교류가 활발하지 않았으므로 일본의 명작 순정만화 등이 아직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되기 전이었다. 파름문고는 바로 이 틈새를 신기하게 이용했다.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끈 만화를 어설픈 솜씨로 소설로 개작해 출간하고, 그것도 모자라 작가의 프로필을 날조해 실었고, 완결이 되지 않은 만화의 경우 자신들이 멋대로 만든 결말로 완결을 내 버렸다. 한마디로 인기 만화가 원래 원작 소설이 있고, 자신들이 출간하는 것은 그 만화의 원작 소설이라는 가짜 주장이었다.


이를테면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소설판으로 개조해 출간하면서 '마리 스테판하이트'라는 가상의 작가 소개와 그 프로필을 싣는 식이었다. 이케다 리요코 역시 큰 영향을 받은 전기 '마리 앙투아네트'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이름을 대강 짜깁기해 붙인 이름인 셈인데, 21세기 초까지 파름문고에 속았던 독자들이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원작자는 마리 스테판하이트라고 논쟁을 벌인 일이 적지 않았으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 70년대에 시작해 아직도 완결이 되지 않은 것으로 악명이 높은 '유리가면'은 평범하지만 연기에 대해 재능과 집념을 가진 요코하마의 소녀 마야가 연극 표를 얻기 위해 혼자서 해넘이 국수를 배달하는 등의 배경을 아예 프랑스로 바꿔 버렸다. 그래서 마야 대신 '조앙'이라는 소녀가 요코하마 대신 르아브르항에 산다. 일본의 전통인 해넘이 국수는 카레 우동으로 변신하고 여기에 '이 지역의 경우 한 해의 마지막에 카레 우동을 먹는 습관이 있다'는 구차스러운 설정이 덧붙여졌다. 


 호소카와 지에코의 대작 순정만화 '왕가의 문장'은 20세기의 고고학도 소녀 캐롤이 고대 이집트로 타임워프되어 현대의 지식을 갖춘 덕에 여신으로 숭배받으며 파라오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 심지어 연로한 모친을 위해 모녀의 공동 작업을 통해 '유리가면'과 마찬가지로 현재까지 연재가 계속되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파름문고 측에서는 책을 팔기 위해 완결을 내야 했고, 연적의 복수로 캐롤과 파라오가 바위에 깔려 죽는다는 꽤 찝찝한 엔딩을 창조했다. 파름문고의 만용은 이 정도가 아니라 이 '왕가의 문장'을 '나일강의 소녀'로 개작하면서 역자 후기에 '이 훌륭하고 감동적인 소설을 만화판으로 어설프고 조악하게 소개한 것을 보니 우리 십대들에게 고대 이집트에 대한 바른 지식과 순수한 사랑을 제대로 소개하고 싶었다'는 동기를 밝힌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한 것인지, 번역가 역시 출판사 측에 속은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특히 이 역자는 파름문고의 여러 작품에 관여하는데, 그가 참여한 작품에는 책 날개에 베레모와 파이프 담배를 문 본인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훗날 당연히 유령 작가겠거니 하고 검색을 해 보니, 어엿하게 문인협회에 소속된 등단 작가일 뿐 아니라 전문 번역가라는 것을 알게 되어 경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람을 S씨라 하자- S씨가 손댄 작품은 너무나 티가 났는데 늘 반복되어 쓰이는 문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사랑할 꺼나…''희여서 외로운 손가락이 바르르 떨고 있었다''아아, 첫사랑은 레몬 츄리처럼 먹을 수 없는 것이었던가…' 그의 역서에는 이런 구절이 빠진 일이 없어서 아, S씨, 하고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S씨는 당시 소녀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캔디 캔디'의 후속작 '미시즈 캔디'를 임의로 집필해 출간했는데, "착한 캔디가 행복해지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소녀들이 자신을 매일 닦달하고 다그쳤다"고 구구절절 호소했다.

(후략)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1/25/2019012501752.html


고스트 라이터가 쓴게 아니라 정식 문인이 그런 마개조소설들을 냈다니 정말 놀랍다
양심을 갖다 판 대신 돈은 많이 벌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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