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여·58)는 지난 2015년 대장암 4기 진단을 받고 큰 충격을 받았다. A씨는 의료진에게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누구보다 건강을 자신해 왔는데 말기 암이라니 그간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당한 느낌이 들었다. 서둘러 항암 치료를 하자는 의사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학생 딸이 행여나 간병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면 어쩌나 싶어 암 진단 사실을 털어놓지도 못했다. 자신이 떠난 뒤 남을 남편과 딸을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샜다. 혹시 오진단일까 기대를 걸고 이 병원 저 병원에 다니는 새 치료는 계속 늦어졌다. A씨는 몇달만에 어렵게 항암을 시작했지만 진단 1년여 만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
삼성병원, 7년간 1362명 추적 관찰
A씨처럼 대장암 환자가 진단 시에 겪는 정신적 고통을 뜻하는 '디스트레스(Distress)'가 심할수록 재발·사망 위험이 최대 153%까지 치솟는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대장암 환자에서의 디스트레스 관리가 실제 사망 위험 등 예후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처음 확인된 것이다.
삼성서울병원 암병원 대장암센터 김희철∙신정경 대장항문외과 교수, 암교육센터 조주희 교수, 임상역학연구센터 강단비 교수 연구팀은 2014년 7월~2021년 7월 원발성 대장암(대장에서 기원한 악성 종양)을 진단받고 근치적 수술까지 받은 환자 1362명을 대상으로 진단 시 디스트레스와 재발 및 사망률의 상관관계를 살핀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21일 밝혔다. 연구 결과는 수술 분야 국제 권위지인 ‘미국외과학회지’ 최근호에 실렸다.
한 병원 의료진이 말기 암 환자의 손을 잡고 있다. 중앙포토.
디스트레스는 암과 그 치료로 인해 환자와 가족이 겪는 신체·정신·사회·영적인 고통을 아우르는 말이다. 조주희 교수는 “보통 환자들한테 ‘얼마나 괴로운가’를 물으면 몸도 아프고 잠도 못 자고 가족이 신경 쓰이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울하다 식으로 기분이 어떠하다고 대답하는데 그런 게 디스트레스인 상황”이라며 “암 환자의 40%가 경험한다고 알려져 있다”라고 말했다.
조주희 교수는 “진단 시나 재발했을 때, 치료가 끝났을 때 등의 중요한 순간에 환자가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는다”라며 “미국에선 암 환자의 디스트레스 선별과 관리가 암병원 인증의 필수조건일 정도”이라고 말했다.
10명 중 7명 디스트레스 커
연구팀은 2014년부터 7년간 대장암을 진단받은 환자 1362명을 대상으로 미국종합암네트워크(NCCN)에서 개발한 디스트레스 온도계와 체크리스트를 이용해 디스트레스 점수를 측정한 뒤 ▶4점 미만 ’낮음’ 그룹 ▶4~7점 ‘높음’ 그룹 ▶8점 이상 ‘매우 높음’ 그룹으로 나눴다. 이후 대장암 무진행 생존율(질병이 악화하지 않은 채 환자가 생존해 있는 기간)과의 상관관계를 분석했다. 그 결과 대상자들의 평균 디스트레스 점수는 5.1점으로, NCCN에서 ’주의가 필요하다’고 밝힌 선(4점)을 훨씬 넘어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환자의 61%가 디스트레스 수준이 높음에 해당했고 15%는 매우 높음으로 나타나 10명 중 7명 이상이 진단 때부터 디스트레스 관리가 필요한 상황으로 나왔다.
미국종합암네트워크(NCCN)에서 개발한 디스크레스 온도계와 체크리스트. 자료 삼성서울병원 제공.
디스트레스가 실제 사망 위험 등 예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연구 대상자들을 추적 관찰했더니, 1000인년(대상자 1000명을 1년간 관찰했다고 가정) 당 디스트레스 낮음 그룹은 재발 및 사망이 50건, 높음 그룹은 67.3건, 매우 높음 그룹은 81.3건으로 각각 나타났다. 상대적 위험도를 통계적으로 계산해봤더니 낮음 그룹 대비 높은 그룹에서 재발·사망 위험이 28%, 매우 높음 그룹은 84% 높았다. 특히 대장암 4기의 경우 이런 위험도 증가세가 가팔랐다. 디스트레스 낮음 그룹보다 높음 그룹에서 26%, 매우 높음 그룹에서 관련 위험이 153%까지 치솟았다.
조주희 교수는 “디스트레스가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해외 연구들이 있지만 심하면 우울증에 걸리고 치료를 잘 못 받는다 정도였다면 이번 연구에선 실제 죽는 데까지 영향을 주는 등 디스트레스와 사망의 인과관계를 밝힌 데 의미가 있다”라고 말했다. 조 교수는 “같은 병기, 같은 나이에 같은 치료를 받더라도 디스트레스가 높으면 예후가 좋지 않고 특히 말기 암 환자에겐 더 안 좋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디스트레스 관심·관리 필요”
최근 암 치료 성적이 좋아지면서 국내 전체 암의 5년 상대 생존율은 71.5%(2020년 암 등록 통계)까지 높아졌다. 암 진단받은 환자 10명 중 7명은 5년 이상 산다는 얘기다. 그러나 암 환자의 스트레스가 여전히 크고 예후에도 영향을 줄 정도인 만큼 관리가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조주희 교수는 “진단 시 환자가 불안해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치료에 잘 집중하지 못한다. 치료를 거부하기도 하고 불안감에 이 병원 저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지연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또 “불안하면 면역력 저하가 오고, 우울증의 증상인 불면, 식욕저하도 암 환자가 공통적으로 겪는 증상”이라며 “최상의 컨디션으로 수술이나 항암을 받는 게 중요한데 그게 안 될 수 있다”고 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술, 담배같이 건강을 해치는 행동도 하게 될 수 있다.
삼성서울병원 암병원 대장암센터 김희철?신정경 대장항문외과 교수, 암교육센터 조주희 교수, 임상역학연구센터 강단비 교수 연구팀. 사진 삼성서울병원 제공.
삼성병원은 2014년부터 암 진단을 받은 전수 환자에 문자를 보내 진료 보기 전 디스트레스 상담실을 찾아 환자가 상태를 평가받을 수 있게 알리고 있다. 상태가 심하면 주치의 차트에도 이를 기록해 필요한 개입을 할 수 있게 한다. 2014년 대장암 1기를 진단받은 B씨(57)는 수술만 받으면 완치가 가능할 거라 했지만, 가정 형편 탓에 치료를 차일피일 미루다 디스트레스 상담실을 거쳐 도움을 받았다. 그는 진단 당시 디스트레스 점수가 10점으로 최고점에 달했지만, 병원 도움으로 후원 단체와 보건소 지원사업 등을 연계 받아 치료받았고 완치돼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다.
조 교수는 “진단 시 스트레스는 조절이 가능한 부분이기 때문에 관심과 관리가 필요하다”라며 “대부분 환자는 잘 몰라서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치료 과정 관련한 정보를 주면 환자가 잘 대처할 수 있다. 환자가 못 잔다고 하면 수면제를 처방하고 통증이 있다면 관련 약을 처방하는 등 직접적 도움도 줄 수 있다”라고 했다.
조 교수는 환자들 스스로가 관심을 갖고 디스트레스 설문지를 통해 본인 상태를 측정하고 필요하면 전문가 상담과 교육을 적극적으로 받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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